참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얄구진 일들이 있다. 내 기억에 의하면 아마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담임 선생님이 이 책을 읽고 와서 너스레를 떨었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였을까? 몇 해전 헌책방에서 정비석씨의 초한지를 찾아 헤매다가 개수를 채우기 위해서 눈에 띄인 이 책을 같이 집어 왔다. 몇 장 읽다가는 그 때 사온 초한지에 묻혀서 책장에 빛바랜 채로 내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몇 일 전이었다. 다소 책을 읽을 것 같지 않던 녀석에게 책을 빌려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 녀석도 나에게 책을 빌려주겠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그 책도 읽지 않을 것 같던 녀석이 처음 꺼낸 책 제목이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였다. 흠. 그렇다 이 책. 읽지 않고는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일요일에 바쁜 일들을 제쳐두고는 책을 집어들었다.
책을 다시 집어 들면서 내가 제일 먼저 확인한 사실은 초판 발행일이었다. 95년으로 보아 내가 초등학교 때 들었다던 기억은 잘못된 기억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중학교 선생님 중에는 저 책을 읽을만한 위인도 너스레를 떨었을만한 선생님도 없는데 그 때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는 정말 의문이다.
책은 빠리를 소개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빠리를 가봐서일까? 그 부분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마치 다시 빠리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책장은 슝슝 넘어갔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그 다음 부터는 한 장, 한 장이 지지리도 넘기기 어려운 책이었다. 재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내용이 그랬다. 그냥 쉽게 읽어 넘기기에는 불편한 그런 내용들이었다. 마지막 장에 홍세화씨가 강조하는 똘레랑스에 관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자격지심인지도 모르겠지만 녀석이 왜 이 책을 첫 번째 책으로 낙점했는지를 조금 이해할 법도 했다.
나름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이 다소간 고통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왼손잡이인데 교육에 의해서 오른손을 쓰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왼손으로 하는 일들이 많다. 왼손을 써야 할 때마다 느끼는데 세상은 온통 오른손 잡이에게 맞추어져 있어서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하지만 녀석의 눈에는 아마도 내가 다름을 틀리다고 인식하는 사람처럼 비춰진 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나의 다름은 존중받고 싶지만 남의 다름은 틀림으로 무시해 버리는 그런 사고를 보여준 건 아닐까란 부끄러운 생각이 책장을 덮는 순간 나의 머릿속을 멤돌았다.
“초보자라고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모든 직업에 데뷔 시기는 있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몽마르뜨르로는 꽤 중요한 길이니까 잘 알아 두세요.”
“글쎄. 나도 잘은 모르오. 그런데 내가 이 제로썸 이론에 주목했던 이유는 다른 데에 있소. 자본의 논리 또는 소유의 논리의 메커니즘에 길들여진 인간들이 이젠 마음 씀씀이조차 그렇게 되었다는 거지요. 우리들은 이제 인간관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는 것조차 아주 인색해졌다는 얘기요. 주는 것은 곧 마이너스이니까 손해보는 것, 더 나아가 패배하는 것이라고 인식하여 되도록 주진 않고 마냥 받으려고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원래 인간의 마음이란 샘과 같아서 주면 줄수록 더욱 충만해지고 깊어지고 또 넓어지는 것이라고 믿소.”
“인간이 모두 똑같이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평등 개념이 창안되어야 했던 것이며, 인간이 모두 같은 이데올로기를 갖지 않기 때문에 인권 개념이 창안되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남민전이 너무 무모했었다고들 말한다. 그렇다. 무모했다. 하지만 나처럼 수학은 잘했지만 계산을 잘 못하는 사람에게는 무모하지 않았다. 나는 계산에 어두웠고 또 계산을 싫어했다. 나는 바보였다. 증오의 사회에 무모하게 저항했던 바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실존이었고 삶이었다. 나는 내가 바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바보였고 또 그 바보스러움을 자랑스럽게 껴안고 있었던 바보였다.
창녀 고양이라고 했던가? 세상은 그런 것 같아. 지금이 죽도록 싫지만, 지나고 나면 그 죽도록 싫어했던 지금이 죽도록 그리워 진다는 거. 그게 인생의 모순인지도 모르지.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