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 이곳이 해가 뜨는 곳이기에…
부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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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에서 서른네 살의 노동자가 자살했다. “이곳이 해가 뜨는 곳이기에”라는 말을 유서에 남겼다. “더 이상 누구의 희생도 아픔도 보지 못하겠으며 조합원들의 힘든 모습도 보지 못하겠기에 절 바칩니다”라는 말도 유서에 적혀 있다. 막 꽃피어야 할 한창나이의 젊음이 자신의 최후로 선택한 정동진엔 오늘도 변함없이 해가 뜬다. 그가 전하고 싶었던 소망과 절망감을 다시 또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이.
삼성전자서비스 직원인 그의 지난달 월급은 45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그 전달에는 70여만원이었다. 분당으로 받는 급여를 뜻하는 ‘분급’에 의해 지급된 것이라 한다. 분급이라는 말. 근래 들어본 가장 끔찍한 단어이다. 이런 임금체계를 현실로 시스템화하는 곳이 바로 삼성이다. 이동시간, 고객에게 설명하는 시간, 수리 준비 시간 등을 다 빼고 오직 제품 고치는 시간만 계산해 1분당 225원을 받는 노동자라니. 이런 끔찍한 착취 앞에 저항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대체 누구이며, 내일은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노조 경영의 악착같은 착취를 ‘초일류기업’의 세련된 이미지로 포장하는 이건희 일가의 재산 13조원을 만들어준 노동자들 중 누구는 백혈병과 희귀병으로 죽어가고 누구는 견디다 못한 자살로 죽어간다.
전세계 139개 나라 중 한국의 노동권이 최하위인 5등급으로 분류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여기가 대한민국호가 서 있는 자리다. 해 뜨는 곳 정동진으로 노랗게 해가 진다.
얼마 전 “코딩 호러가 들려주는 진짜 소프트웨어 개발 이야기”란 책을 사러 서점을 가는 길에 서점에 책이 없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지하철 앞에서는 핸펀으로 재고 검색을 하다 핸펀을 떨어뜨렸다. 핸펀을 바닥과 접촉시키는 일이야 늘상 벌어지지만 그날은 재수가 없었는지 액정이 깨져 버렸다. 갤럭시 S4 LTE-A, 산지도 얼마 안된 핸펀 액정이 또 깨지다뉘. 절망하면서 핸펀을 다시 켜는데 어랏. 액정이 아예 켜지지도 않았다. 진짜 액정이 깨진 것이다. 액정 앞에 강화유리(?!)가 깨진게 아니라. 고약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를 어쩌지 하면서 삼성전자 서비스 센터를 갔다. 서비스 센터 앞에서는 전형적인 블랙 컨슈머 흉내를 낸다. 천연덕스럽게 액정이 안 나와서 왔다며 바보 코스프레에 들어갔다. 센터 직원 아저씨가 친절하게 안경 닦는 천으로 닦더니 안이 깨져서 화면이 나오질 않는다고 외부에서 충격을 가한 것 같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니 오른쪽 모서리에 스크래치가 난 자국을 문제 삼으며 이쪽으로 충격이 가해지면서 안에 있는 액정이 깨졌을 것이란 놀랍도록 정확한 추론을 펼쳤다. 난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오른쪽 모서리는 원래 그랬고, 충격을 가한 적도 없으며, 그 충격을 가해서 안쪽 액정이 깨졌다는 것을 내가 증명해야 하는 문제냐고 했다. 증명이란 단어에 아저씨는 머리가 조금 아파하는 표정을 짓더니 안에다 물어보고 오겠다고 했다. 그리곤 잠시 후 나오더니 원래 공짜로 되지 않는 것인데 애매한 상황이라 공짜로 해주는 것이라며 10만원 상당의 액정 모듈 교체를 공짜로 해주었다. 친절 사원 쓰는 곳에 난 센터 직원 아저씨 이름 옆에 짱짱맨을 적어주며 기분 좋게 나왔다.
난 삼성이란 기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공짜 수리 사건으로 급 호감이 갔다. 담에도 삼성 폰을 사야지 이러면서. 더 부끄러운 사실은 이 쪽팔린 공짜 수리 사건을 무슨 무용담이라도 되는양 의기양양하게 주변에 떠벌리고 다녔다는 점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 무용담에서 삼성이란 기업은 철저하게 착한 기업으로 각색돼 있었다. 물론 이런 행위에 드는 비용 일체가 핸드폰 가격에 포함돼 있고, 그래서 우리가 호구처럼 비싼 가격에 핸드폰을 사야한다는 사실을 모르지도 않는 사람이 그랬다는 사실이 더 창피할 뿐이다. 분급이란 기사를 보니 있으니 이런 나의 어리석은 행동이 더 민망하게 느껴졌다. 다음엔 꼭 LG 폰을 사야겠다. 옵지3가 잘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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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보는 자본주의의 민낯
난 자본주의를 딱 저 사진처럼 느낀다. 따스함이란 없는 무자비한 약육강식의 세계, 일말의 공정함도 기대하기는 힘든 시스템. 이건 비단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기업이 제품을 파는 일도 똑같다. 좋은 제품을 만들면 잘 팔릴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그 중간에 온갖 정치, 음해, 공작 같은 것들이 있고, 시장을 비정상적으로 왜곡시키는 광고나 마케팅 효과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껏 주가를 올리고 있는 그 표절 게임만 해도 그렇다. 지나가는 게임 개발자 100명에게 물어보면 100명 모두 그 게임이 그렇게 매출 순위가 높은 게임이 되는 건 공정하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시장에서 그 게임은 엄청난 매출을 올리고 있다. 내가 바라보는 자본주의 시장은 그렇다. 제 아무리 좋은 걸 만들어도 하나도 못 팔 수도 있고, 쓰레기를 만들어도 날개 돋친 듯 팔릴 수도 있다.
가끔 직원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깜짝 놀랄때가 있는데, 그들이 나와는 정반대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을때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해서 굉장한 퐌타지와 이데아를 가지고 있는 경우라 할 수 있겠다. 난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세상을 너무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그들 말에 따르자면 구조조정이란 단어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전 지구를 협동조합이라는 가장 우수한 조직 시스템이 장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뉴스에 감기처럼 달고 나오는 게 구조조정이고, 주식회사라는 시스템이 전 지구를 뒤덮었다.
이런 묘한 아이러니 속에서 난 도대체 왜일까라는 의문이 생겼고 자본주의를 좀 더 제대로 알아야 겠다는 생각에 얼마 전 “자본주의 이해하기”라는 책을 샀다. 이 책을 통해서 난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해서 충격을 더 받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내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자본주의는 냉정하고 차갑고 비정하며, 또한 무기력한 시스템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 하나가 실업 문제에 대한 결론이었다. 사실 분급이라는 게 따지고 따지고 따지고 또 따지고 들어보면 좋은 일자리가 많이 없다는 결론으로 더 파고 들면 실업 문제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책에서는 실업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너무나도 냉혹한 결론을 너무나도 논리 정연하게 기술하고 있기에 일말의 반박을 할 여지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고용주도 노동자들도 이러한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라는 결론은 정말이지 떨떠름할 따름이다.
케인스는 이 논리를 거부했다. 그에 따르면 실업은 임금이 너무 높아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노동이 생산한 재화에 대한 수요가 너무 적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가 생산물에 대한 대한 수요가 불충분하기 때문이라면 해결책은 임금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높이는 것”이라고 케인스는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물건을 사기 위해 지불하는 소득의 근원이 임금이고 경제의 산출물에 대한 수요의 상당 부분이 바로 임금에 의해 뒷받침되므로, 고임금은 수요의 증가를 낳고, 수요의 증가가 이번에는 산출의 증가로, 고용의 증가로, 그리고 실업의 감소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케인스의 이론이 보여주는 것은 1) 자본주의는 실업을 해결할 수 있는 자동적 메커니즘을 갖고 있지 못하며, 2) 자본주의 경제에서 실업은 비자발적인 것이며 임금이 낮아진다고 해도 실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 중략 …
셋째, 고용주의 입장에서 임금을 낮추는 것이 이윤 극대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적 임금 w’보다 임금이 낮으면 단위 노동비용은 오히려 상승한다. 임금을 낮추어 비용을 절감할 수 있지만 그 결과 노동강도(e)가 낮아지고 산출량이 감소해 임금 하락으로 얻은 비용 절감분보다 노력 지출량 저하에 따른 손해가 더 커지기 때문이다. 즉 고용주는 임금을 w’이하로 낮출 유인을 갖지 않는다. 현재 임금수준 w’보다 낮은 수준에서도 기꺼이 일할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이들을 낮은 임금으로 고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임금을 낮춤으로써 단위 노동비용이 상승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 결론은 중요하다. 바로 우리가 4장에서 본 케인스의 주장, 즉 실업자들이 현재보다 낮은 임금수준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음에도 실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바로 이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에서 비자발적 실업은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실업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현행 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음에도 일자리를 찾지 못한다는 사실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실업이 항구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노동시장에서 초과 공급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임금이 더는 하락하지 않을 것임을 말해준다. 초과 공급이 존재하고 더 낮은 임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에도 아무도 이들을 데려가려고 하지 않는다. 고용주도 노동자들도 이러한 상황을 개선할 수 없다.
-- 자본주의 이해하기, 새뮤얼 보울스, 리처드 에드워즈, 프랭크 루스벨트
언젠가 친구네 회사가 회식비와 경비 일체에 대해서 3개월간 시험적으로 제한을 없앴다는 이야기를 했다. 즉, 회식 때 마음껏 먹고 마시고 놀아도 된다는 것이다. 니들이 한강에서 요트를 타고 선상 파뤼를 하며 회식을 하더라도 다 처리해 주겠다는 대인배적 마인드라 할 수 있겠다. 이 사건과 몇 가지 행동을 두고 친구 녀석은 회사 대표가 착한 사람 같다는 표현을 썼었다. 그때 난 그 사람이 절대 착하지 않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제한을 풀고 복지를 늘리고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일거라는 막연한 소리만 했었다. 그런데 “자본주의 이해하기”라는 책을 보면 그 대표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너무나도 논리 정연하게 설명해 놓고 있다. 두 글자로 그 대표가 취하는 행동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데 단어가 너무 언짢아서 차마 여기다 옮겨 적기는 좀 그런 것 같다.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사서 읽어 보도록 하자.
난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책을 읽고 자본주의 시스템이 돌아가는 기본적인 원리나 생리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사는데는 퐌타지나 이데아 보다는 이러한 차가운 진실들이 더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게임의 법칙을 알아야 게임에서 이길 확률이 올라갈 것이고, 적어도 지더라도 왜 졌는지 원인 분석은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진짜 아이러니 한 사실은 이런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사람들은 더 꼼꼼하게 밑줄 쳐가면서 읽고 정작 읽고 이해해야 할 사람들은 막연하게 퐌타지만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는 점이다.
#2
1890년 촬영된 이 사진은 높다란 마천루 안에 은밀하게 숨겨진 뉴욕 빈곤층의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자의 노령 연금과 의료비를 보장하려는 기업은 없었다.
법원 역시 작업 중 입은 재해는 노동자가 책임져야 하며 근로기준법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미국 노동자들은 거대한 기업 권력에 관해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투표를 통해 그들을 쓰러뜨릴 수 있지만 투표함은 그들이 점유하고 있죠.
우리는 법원에서 정의를 찾을 수 있지만 법원은 그들이 세운 겁니다.
… 중략 …
1903년 2월 대로우는 이렇게 변론했다.
미국의 문명이 광부와 노동자들의 굶주림으로 이루어졌고
겨우 열두서너살 된 아이가 먼지 날리는 무연탄 광산에서 석탄을 주워 생활을 영위한다면
빨리 이 문명을 포기하고 새로운 문명을 시작하는 것이 인류에게 좋을 것이다.
-- 기업의 힘 E04
자본주의 역사가 정확하게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100년 전에도 지금과 비슷했던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존재라고들 한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되는지도 모르겠다. 불평등이 극에 달했던 시스템은 모두 파괴되고 붕괴되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계속 유지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힘을 가진 높으신 분들이 바리케이드의 역사를 잊지 않는 지혜를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었다. 말하자면, 지금과 너무 흡사하게, 그 시절 목청 큰 권위자들 역시 좋든 나쁘든 간에 오직 극단적인 비교로만 그 시대를 규정하려고 했다.
-- 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