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뉴욕 타임즈에 한 장의 사진이 게재됐다. 수단의 한 아이가 죽어가고 있고, 그 옆에는 독수리가 그 아이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진. 독수리는 죽은 고기만 먹기 때문에 아이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진이 게재된 뉴욕 타임즈에는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도대체 이 사진을 찍은 사진 작가는 뭐하는 놈이냐? 저 상황이 사진이나 찍고 있을 때냐? 아이를 구하는게 먼저 아니냐? 누구나 사진을 보고 느낄 법한 항의들. 그만큼 사진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적이었다. 이듬해 사진을 찍은 사진 작가 케빈 카터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그 후 얼마뒤 자살했다. 물론 사람들의 비난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진실은 이렇다. 케빈은 수단 내전의 참상을 알리기 위한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서 수단에 있었다. 한날 그는 보호소를 떠난 좀 먼곳의 실제 상황을 알기 위해 떠나서는 위 장면을 목격했다. 잽싸게 사진을 찍고는 독수리를 쫓아냈다. 하지만 아이는 구하지 못했다. 전염병이 많아서 구호 활동을 하러 온 사람들과 현지인의 직접적인 신체 접촉은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즈는 그가 찍은 사진을 잘 알아봤고 수단 내전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서 신문에 게재했다. 사람들은 뉴욕 타임즈의 의도대로 엄청난 감정의 폭풍을 경험하고 내전의 참상을 알게 됨과 동시에 사진에 대한 온갖 비난들을 쏟아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본 퓰리처 재단은 퓰리처 상을 수여했다. 그리고 얼마뒤 사진 작가 케빈은 자살했다.
그 사진을 찍은 작가, 게재한 뉴욕 타임즈, 분노한 사람들, 상을 수여한 퓰리처 재단…
사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진 작가는 자살을 했다.
오해 – 법정
‘나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정체는
‘나는 당신을 죽도록 오해합니다’일지도 모른다.
누가 나를 추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낼 일도 못 된다.
그건 모두가 한쪽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이다.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가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다.
실상은 말 밖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는다.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