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20대 초중반일 때 정말 좋아하면서 기다리며 읽었던 칼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세이노라는 필명을 쓰시는 분의 칼럼이었습니다. 주제는 주로 경제와 재테크,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한창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가 유행할 때에 그 분이 “부자아빠의 진실게임”이라는 책을 쓰셨었는데 그 내용이 참 공감했습니다. 결국 책장사라는 이야기는 저에게는 조금 신선한 충격이었거든요. 검색해보니 지금도 여전히 열심히 활동을 하시는 것 같네요. http://cafe.daum.net/saynolove
다른 하나는 마이크로소프트웨어에 연재되던 “디지털 메신저”라는 칼럼이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웨어가 집으로 배달되면 항상 제일 먼저 찾아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성언님이 쓰셨던 칼럼인데 그 분이 엔지니어로 생활하면서 느끼는 것들에 대한 내용이 주된 주제였습니다. 그 때 그 글이 너무 좋아서 그 분 홈페이지를 찾아서 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놓친 마이크로소프트웨어 원고가 잔뜩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참 기뻐했던 기억이 나네요. 홈페이지 제목이 “인터페이스 저널”인가 그랬는데 이름도 참 멋있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검색해보니 찾기가 쉽지 않군요. 아래는 제가 그 때 불펌해 두었던 원고 중에 하나입니다. 다시 읽어도 글이 짠하네요.
덧) 제가 글을 쓰고 책 제목이 잘못된 것 같아서 검색을 한다고 “부자아빠 죽이기”를 쳤더니 구글에 방금 퍼블리싱한 이 글이 뜨는 군요. 구글은 정말 토나오는 군요. 어떻게 이렇게 빨리 검색을 할까요? 헐~ 제가 “부자아빠의 진실게임”을 “부자아빠 죽이기”로 잘못 적었더군요.
안다는 것에 대하여
TV 퀴즈 프로그램은 요즘에도 여전히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나름대로의 스릴감을 얻을 수도 있고 가끔씩 대단한 실력자들의 해박한 지식에 부러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역시 아무도 못푸는 문제를 혼자 풀어내고선 자아도취에 빠지는 달콤한 즐거움도 무시할 수 없다. 퀴즈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우선 남들이 아는 만큼은 다 알아야 하는 것은 물론, 각 분야를 망라해서 상식의 수준을 넘어서는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할 것 같다. 퀴즈 프로그램 같은 것이 지식의 각축장인 것은 분명하지만, 여기서의 지식이란 우리가 익히 알고있던 전통적인 개념으로서의 지식에 가깝다는 생각이든다. 최근의 십여년간 우리가 알고 사용해 왔던 지식이란 것이 어떤 근본적인 변화를 겪어 오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느끼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이들을 서로 구별할 만한 수단, 이를테면 이를 나타내는 새로운 낱말같은 것이 없는 만큼 이들 간의 혼동을 부를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내친 김에 퀴즈하나,
다음 중 문방사우 중의 하나가 아닌것은? 1. 종이 2. 붓 3. 연적 4. 벼루
문방사우는 먹을 찍어 붓으로 글을 쓰던 조상들의 생활에서 비롯된, 필기도구에 대한 선비들의 멋스러운 의인화일 것이다. 4 라는 숫자는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은 대다수의 사람들의 두뇌를 조건반사적으로 자극시키는 마법의 숫자이다. 위의 문제는 일단 안정되고 완전해 보이는 정사각형의 구조에 흠집을 냄으로서 우리의 뇌구조에 혼란을 유발시켜 다시금 완전성을 갈구하는 충동을 야기시킨다. 어느정도 합리적인 추론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답을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불안하긴 마찬가지이다. 답을 원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정신적으로는 한결 편안한 상황일 것이다. 그들은 학교에서 배웠거나, 책을 통해서, 아니면 그냥 어디선가 들어서 쉽게 정답을 댈 수 있을 것이다. 논리적 근거란 이런 종류의 문제에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 아마도 옛 선비들이 그냥 그렇게 정해서 부르게 된 것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어느 누군가가 나서서 ‘신문방사우’로 컴퓨터,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를 댄다고 해서 별로 나쁠 것은 없어보인다. 다만 마우스와 키보드를 입력장치로 통합시키고 모뎀을 넣어야 한다든지, 인터넷을 포함해서 문방오우로 해야 한다는 식의 논쟁거리가 생길 것 같기는 하지만.
지식, 지식인이라는 표현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지식인의 고뇌라든지 “지식인들이여 현실 사회에 동참하라”와 같은 표현은 어디선가 계속해서 많이 들어왔던 것들이다. 하지만 요즘 흔히들 일컫는 지식이란 것이 문방사우와 같은 류의 지식처럼 지금껏 사용되오던 인문학적이고 때로는 일반교양, 상식을 나타내는 듯 한 그 단어와 같지 않으리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하긴 정말 어렵게 만난 지식의 여신이 그저 백과사전을 꺼내들 뿐이라면 매우 실망스러울 것이다.
잘 아시다시피 피터 드러커 교수는 경영학분야의 대가이며 컨설턴트로서 명성이 높은 사람이다. 피터 드러커 교수의 최근 시리즈 물의 하나인 The Essential Drucker on Individuals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상당히 직접적인 답을 찾을 수 있다. 책의 전반적인 주제는 지식인의 생산성 향상에 대한 고찰이지만, 저서의 초반부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금껏 통용되오던 지식의 의미를 재정의하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지식이란 고도로 전문화 된 것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do)을 의미한다. 즉 새로운 시대에서 요구하는 것이 사지선다형 문제에서 문방사우가 아닌 것을 골라내는 능력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단순히 기술적 의미를 떠나서 모든 분야에 있어서 피상적인 것보다는, 보다 전문적이고 실천적인 것이 사회나 경제적 측면에서 가치를 만들어 내는 시대가 된 것이다. 시대의 요구가 이러하다면 엔지니어, 개발자의 입장에서 최우선적으로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인가는 자명하게 드러난 셈이다. 결국은 자신의 ‘앎의 수준’이 개인 경쟁력의 밑바탕이 될 것이다.
작년 초에 상대적으로 젊은 친구들과 수개월간 학원 생활을 한적이 있다. 그 당시에 나를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에 대해 잘 아세요?”와 같은 식의 질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잠시 머뭇거려야 했던 이유가 단순히 내가 말주변이 부족해서만은 아니었던 것이, 내가 보기엔 ‘안다는 것’이란 그렇게 쉽고 묻고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