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codemaru · December 08, 2008 · 7 min read

출근 길에 버스를 타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보통은 mp3를 꼽고, 책을 읽곤 하는데 오늘 따라 귀찮아서 mp3만 끼고는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버스 앞자리에 낙서가 되어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마을 버스 같은 경우에는 낙서가 많이 되어 있어서 진짜 심심한 날이 아니면 읽어 보진 않는데, 이 버스는 일반 버스인데다, 노란 시트에 적힌 딱 한 줄의 낙서라 눈에 띄더군요. 화이트로 적은듯한 그 글씨는 다음과 갈았습니다.

ㅈㅎㅇㅅㄹㅎ

모음은 없지만 금방 무슨 말인지 떠올랐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3초 안에 한 가지 문장이 떠오를 겁니다. 다른 문장을 만들순 없을까를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제 상상력의 한계 탓인지 딱히 마땅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더군요. '이 동네 어떤 중삐리의 소심한 사랑 고백일까?'라는 의문을 가지고는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낙서를 보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낙서를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은밀한 곳에 되어 있는 낙서를 보는 것을 더 좋아하죠. 낙서를 위해 일부러 오픈해둔 음식점 벽면과 같은 공간 보다는 왠지 낙서를 해서는 안될 것 같은 공간에 쓰여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전 대학교 도서관 화장실은 참 좋은 공간이었습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낙서들인데 앉아서 읽다보면 풉하고 웃게되는 그런 낙서들이 많았죠. 제가 보았던 가장 흥미로운 낙서중에 하나는 "100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라는 말에 대한 낙서였습니다. 과연 몇 번을 찍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가에 관한 이야기를 수식같은 걸로 진짜 욱기게 적어 놓은 낙서였습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그런 참신한 낙서가 하나 적히면 거기게 리플이 달린다는 사실입니다. 반론이 제기되고, 반론에 반론이 제기 되고, ... 그러다 세월과 함께 청소 아줌마의 손길이 닿으면 그 낙서의 원문은 지워지고 중간에 알 수 없는 묘한 한 문장만 -- "여자는 찍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 남게됩니다.

낙서에 관해 또 하나 재미난 기억은 대학교 시험 때 있었습니다. 대학교에서 컨닝하는 유치한 방법 중에 하나로 판치기라는 방법이 있습니다. 책상에 핵심 내용들을 미리 적어두는 아주 유치찬란한 방법입니다. 자리바꾸기 신공만 피하면 그럭저럭 쓸만한 방법이죠. 판치기에도 상도가 존재하는데 바로 연필로 쓰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다음 사람이 지우고 다시 쓸 수 있거든요. 그래서 보통 판치기는 지우개로 책상을 지우는 일로부터 시작한답니다. 그 날도 전 시험 시작 전 책상을 지우고 있었더랬죠(처음이었습니다 ㅋㅋ). 지우개로 막 지우는데 중간에 시꺼먼 유성 매직 같은 걸로 써진 조그만 글씨가 보이더군요.

여기다 판치기하면 3년 동안 재수 음따.

아주 그냥... 딴 책상 가서 할려다가 그냥 그 날은 쉬었습니다.
그 낙서를 본 것 만으로도 충분히 재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ㅋㅋㅋ~

중딩, 고딩때는 책상이나 교과서에 낙서를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주로 게임들의 연속기를 적어놓고 외우는 일들을 많이 했었습니다. 심지어 교과서 오른쪽 하단 부분에 그림을 그려서 연속기의 연속 동작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는 놈들도 있었죠. 가끔은 서로 새로운 연속기를 적어서 교환하고는 토론하는 일들도 있었답니다. 낙서를 넘어서 책상을 오락기로 개조하는 엄청난 녀석들도 종종 있었죠. 스프링과 유리 테입 그리고 칼로 오락기 버튼을 아주 기가막히게 모조한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버스 자리의 노란 시트, 화장실 벽의 하얀색 타일, 연갈색 책상 판, ...

모두 다 무언가를 적으라고 만들어 둔 공간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낙서를 할까요?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누구나 흔적을 남기고 싶은 본능은 있으니까요...

오래 전, 술집 벽면에 했던 낙서들...
공중 전화 박스에 했던 낙서들...
도서관 사물함에 써 둔 낙서들...

더 오래전, 불국사 다보탑 가는 길의 어느 나무에 했던 낙서...
속리산 문장대 바위에 새겨둔 글자들...
책상 위에 적어둔 연속기들...

아직도 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누군가 본 사람이 있을까요?...
무지 궁금해지는 오늘입니다. ㅋㅋㅋ~

@codem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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