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아련한 기억속으로

@codemaru · October 28, 2001 · 6 min read

난 어렸을 적 무척 멍청했던 것 같다. 솔직히 바보였던 것 같다. 하여튼 그렇게 멍청한 유치원 생활과... 초등학교 생활을 했었다.. 그런데 나도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 언제인가부터 점점 똑똑해진 것 같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 난 늘 누나들을 따라다녔던 것 같다. 그러다 둘째 누나가 고학년이 되던해... 즉 내가 4학년이 되면서부터 난 우리동네 골목대장이 되었다.. 늘 꼬맹이들... 3학년 이하의 아이들을 지휘하며, 난 대장이었다... 사실 우리 동네에 나보다 나이가 많은 형은 딱 세명이 있었고, 같은 또래 아이가 한명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우리 또한 우리끼리 즐거워하며 지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우리 패거리는 주로 5~6명 이었던 것 같다... 사실 사람이 많을때는 10명이 넘을때도 있었다... 그 아이들 중에는 몇년을 같이 놀았던 아이들도 있었는데.. 그 아이들의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네들의 집이 어디였는지는 아직도 기억난다. 양복 1번지 집아이, 그 옆집 분식점아이, 맞은편 헌책방 아이, 그 뒷쪽 분식점아이, 교회 뒷편에 사는 아이...

우리의 주요 놀이는 몇가지로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늘 자신들을 특공대로 생각하고, 생활하는 습관이 있었다. 브니엘 중학교 옆으로 즐비해 이쓴ㄴ 불법주차 트럭들은 우리의 주요.. 트레이닝 장소였다. 우리는 늘 그 트럭을 타고 브니엘 중학교 테니스 장 뒤로 숨어들어 가곤 했다. 수위는 늘 우리의 적이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우리의 놀이터인 중학교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수위를 피해 중학교로 들어가는 방법을 수십가지는 알고 있었고, 늘 트레이닝을 통해 능숙하게 드나들 수 있었다. 마침내는 수위는 우리를 잡기 위해서, 그가 타던 자전거를 모터식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우리의 제 2단계 트레이닝은 땅굴파기였다. 늘 우리는 브니엘 중학교 씨름장에 아주 멋진 땅굴을 파고 호수를 만들었다. 바로 옆에 수돗가가 있었기에 우리에게는 금상첨화였다. 땅굴에 대한 기초지식을 가진 아이는 나를 포함해 딱 두명이었다. 우리는 늘 아이들에게 성을 무너지지 않게 짓는 법이나, 흙이 나올때까지 깊게 파는 법을 가르쳤다. 그렇게 땅굴이 수위에게 들통나면 우리는 그것들을 그대로 둔채, 야산으로 숨는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우리는 사격 연습을 시작한다.

브니엘 중학교에는 모개라고 하는 특수한 열매가 많았으며, 우리는 그것들을 사격 연습에 사용하였다. 그것도 질리면 우리는 중학교 조례대로 가서 각종 유격훈련을 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수십가지가 넘는 자세로 붙어 있을 수 있고, 다시 교단위로 능숙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유격 훈련을 마치면 다시 테니스 장으로 가서 생존 훈련을 받는다. 우리가 갖고 싶어하는 테스스 공들은 주로 브니엘 중학교의 폐쇄된 물탱크속에 있었으며, 그 속은 엄청나게 어둡고 더러웠다... 우리는 그 속에서 테니스 공을 꺼내오는 것을 임무로 삼았는데... 늘 혼자 유일하게 내려가서 아이들에게 공을 꺼내주고는 했던것 같다...

그런 훈련들 외에 우리가 주로하는 놀이는 피구였다. 난 동네에서 피구를 가장 잘하는 아이였다... 원래 나는 던지기보다 받기를 잘하는데, 동네 피구에선 던지기도 종종했다. 난 나의 운동신경이 뛰어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6년동안 운동회 달리기에서, 내가 상을 탄건 아마 두번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한번은 실수로 받은 것이고, 다른 한번은 장애물 달리기였다.

@codem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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