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 용꼬리 vs 뱀머리, 당신의 선택은?

@codemaru · September 13, 2025 · 18 min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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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서 이기는 것보다 전쟁에서 이기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또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도 있다. 비슷하게 반백년 가까이 살아보니 인생 전체를 보면 세부적인 어떤 노력이나 선택보다는 큰 틀에서의 세계관을 잘 정하는 게 전체적으로는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많이 경험했다.

그런 큰 주제 중에 하나가 용꼬리와 뱀머리 논쟁이다. 바닥을 쓸어도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것이 용꼬리 쪽 입장이라면, 구멍 가게에서 일을 해도 대장질을 하겠다는 것이 뱀머리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세상은 이렇게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나뉘진 않는다. 대부분은 그 사이 어떤 지점에서 선택을 하게 된다. 둘의 세계관은 뭘 더 중시하겠냐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태생적으로 뱀머리 주의자였다. 일단은 경쟁 환경에 노출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선택권이 나에게 없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죽이되는 밥이되든 내가 선택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자유의지가 실제로 존재하든 하지 않든 내가 주도한다는 느낌이 드는 환경을 좋아했다. 그리고 이전 글에서도 밝혔듯이 게이트 키퍼를 좋아하지 않기에 누가 나를 평가한다는 것을 그닥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결론적으로 그건 큰 세계로 나가는데에는 장애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주변에서 더러 그런 말들을 들었다. 더 좋은 대학을 가지, 더 좋은 과를 선택하지, 더 좋은 회사 취직하지, 왜 그러고 사냐 같은 말들 말이다. 하지만 강철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등가교환 원칙처럼 이런 것들이 반대로 가져다 주는 장점도 크다. 일단 스트레스 레벨이 낮아진다. 마음이 평화롭고, 자기 효능감이 커진다. 이게 얼마나 큰지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또 추구하지 않아도 자존감이 보충된다.

뭐 발전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비판해도 할 말은 없다. 어쨌든 개인적인 선호가 마음 편한 게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니 말이다. 안그래도 짧은 인생, 불필요한 것들로 스트레스 받으며 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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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서판교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내가 살았던 동네 중에는 가장 부자 동네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주변에서 내가 평소에는 흔히 경험할 수 없었던 장면들이 더러 눈에 띄었던 것이다. 처음 충격을 받았던 게 기사였다. 대체로 기사라는 존재는 드라마 외에는 현실 세계에서는 볼 수가 없었던 나는 그 동네 살면서 숱하게 기사를 만났다. 출근하러 주차장에 가면 항상 말끔하게 차려입고 대기하는 기사님들이 계셨다. 그 정도는 그냥 넘겼다. 같은 라인에 사장님이 사는구나 싶었다.

애들 어린이집을 등원시켜 주면서도 그런 일들이 반복되니 조금 신기했다. 한날 애들 생일 선물을 잘 챙겨주는 어머니랑 등원 시간이 겹쳐서 만나게 됐는데 일단 아주 고급 차를 가지고 온 것은 워낙 흔한 일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애들을 맡기고 차를 타는데 기사가 나와서 문을 열어 주는 걸 보고는 뭐지 싶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분은 전업주부였다. 그때 어렴풋이 느꼈다. 아 이동네 분위기가 좀 다르구나.

그러다 결정적인 일이 집 앞 커피숍에서 있었다. 노트북으로 코딩을 하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커서 본의 아니게 옆 테이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그 동네 사람들이 대체로 집에 일하는 이모님들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 다음이 더 가관이었다. 중국어 튜터를 애들 별로 한명씩 고용할지 말지를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결심했다. 아 이동네 살아서 나한테 좋을게 그닥 없겠구나. 그리고 그 해 나는 이사를 갔다. 어쨌든 그 동네는 내가 살기에는 큰 연못이었던 셈이다.

#2

세상은 참 다양한게 나와 정반대의 입장인 사람들도 많다. 한 지인은 애를 예술 중학교에 입학시켰다. 그 집 사정을 알기에 다소 의문스럽기도 했는데, 본인이 하는 얘기를 들어봐도 내 생각과 비슷했다. 학교 입학식에 애를 데리고 갔는데 국산차를 타고 온 것은 본인 밖에 없었다는 얘기였다. 더 심각한 건 그 학교 학비였다. 맞벌이인 그 집 세후 소득의 거의 절반이 그냥 학비로 소진된다고 했다. 물론 별도의 레슨 비용이나 이런 걸 따지자면 훨씬 더 들 것이다. 이렇게까지 뒷바라지를 한다손 치더라도, 애는 아마 그 학교를 다니면 다닐수록 더 많은 격차를 느낄 가능성이 높다. 지인은 동네 피아노 학원은 할 수 있겠지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걸 하기 위한 투자치고는 너무 큰 게 아닌가 싶었다.

소셜 믹스를 선호하는 사례도 있었다. 강남 고급 주택가에 새로 들어서는 단지의 임대 주택 조건에 본인이 해당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모모 회장님 아들과 같은 초등학교에 애를 보낼 수 있어서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워낙 오래전 일이고 그다지 친분이 깊은 사이는 아니라 네네 했는데,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분이 꿈꿨던 회장님 아들과 어릴 때부터 끈끈한 친구가 되는 그런 환상적인 일이 벌어지기보다는, 현실에서는 <더 글로리> 같은 전개가 펼쳐질 확률이 훨씬 더 높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거기서 사라는 혜정이에게 다 커서 이런 대사를 날린다.

근로소득세 내는 넌 모르는 종합소득세 내는 세계가 있단다, 혜정아.

-- 더 글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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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 그냥 개인적인 선호나 느낌일 뿐이지 않을까, 이런 세계관의 선택이 뭐가 크게 중요하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 과학적인 뭔가가 있을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온갖 것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많다. 둘의 세계관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결과를 보여주는 연구들이 있는 것이다. 아웃라이어로 유명한 말콤 글래드웰의 저서 다윗과 골리앗을 보면 관련 내용이 나온다. 몇 가지를 소개해 보면 이렇다.

하나는 대학별로 STEM 전공 기준 졸업생 비율을 조사한 연구다. 흥미롭게도 대학의 순위를 가리지 않고 1/3 정도만 학위를 취득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버드에 간 꼴지가 이름모를 대학에 들어간 1등보다는 몇배는 똑똑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버드 꼴지는 학위 취득에 실패했고, 이름모를 대학의 1등은 학위를 취득했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코멘트를 추가한다.

이 '하버드의 얼간이들'은 매우 크고 무시무시한 연못에 사는 작은 물고기다. '하트윅 올스타'는 매우 푸근한 작은 연못에 사는 큰 물고기다. 이공계 학위를 받을 가능성을 결정짓는 데 중요한 것은 단지 당신이 얼마나 똑똑한가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교실 안에 있는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서 얼마나 자신이 똑똑하다고 느끼느냐 하는 것이다.

-- 다윗과 골리앗, 말콤 글래드웰

또 다른 연구 자료로 우수한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의 연구 업적과 낮은 순위의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의 연구 업적을 비교한 내용이 소개된다. 우수 대학의 상위 1% 학생은 당연하게도 가장 뛰어난 논문 발표수를 자랑한다. 하지만 상위 20%만 되더라도 하위 대학의 상위 1% 학생이 압도한다. MIT의 상위 1% 학생은 평균 논문을 4.73개, MIT의 상위 20% 학생은 평균 0.83개, 상위 45%는 0.12개를 발표했다. 30위 이하 대학교의 상위 1%의 평균 발표 수는 1.05다. 당연히 MIT의 상위 45%가 30위 이하 대학교의 상위 1%보다 훨씬 똑똑한 학생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졸업 후의 연구 업적은 하위 대학 졸업생이 오히려 더 높은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판단한다.

그런데 왜 대학원에 지원할 때까지는 모든 것을 잘해낸 승자였던 다수의 성공적인 학생들이 박사과정 훈련을 받고 난 뒤에는 그토록 별볼 일 없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학생들을 잘못 길러온 것인가, 아니면 학생들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 것인가?

물론 대답은 둘 다 아니다. 아무도 누군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 결과는 최상위권 학생들에게는 끝내주는 곳인 엘리트 학교가 다른 모든 학생들에게는 아주 힘겨운 곳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줄 따름이다.

-- 다윗과 골리앗, 말콤 글래드웰

이후 책에서는 다소 파격적인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특수 전형 이야기다. 학업 성취 능력과 상관 없이 우대해서 입학시켜주는 정책 이야기다. 이를 먼저 도입한 학교로 하버드를 예로 드는데 그 시발점이 큰 연못의 위험함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다. 결국 누군가는 하위 1/4를 해야하고, 그렇다면 자존감을 예체능등 전공과 상관 없는 특수 분야에서 충족한 학생들로 채우려는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냉정하게 달리 말하면 그들은 그냥 다른 학생들의 자존감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입학시켰다는 말이 된다. 진실이든 아니든 다소 충격적이긴 하다. 그러면서 저자는 사배자 전형을 언급하는데, 그게 과연 도움이 되는 것일지 아닐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인다.

#4

논쟁적일 순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사례와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많은 경우 '뱀의 머리'가 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자신의 능력과 별개로 주변 환경이 주는 압박감과 상대적 박탈감은 개인의 잠재력을 갉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극단적인 환경을 이겨내는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도 있겠지만, 평균적인 우리에게는 환경의 영향이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천하의 제프 베조스조차도 양자역학을 듣고는 물리학자의 길을 접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물리학을 공부할 생각으로 프린스턴 대학에 진학했다. 아주 좋은 계획처럼 보였다. 양자역학 수업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느 날인가 어려운 미분 방정식을 풀던 그와 룸메이트는 도움을 구하러 다른 친구의 방을 찾아갔고, 친구는 문제를 잠시 들여다보더니 답을 알려주었다. 풀이 과정만 장장 세 페이지에 이르는 그 문제를 머릿속으로 계산해낸 친구를 보고 베조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순간 저는 위대한 이론 물리학자가 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불길한 신호를 포착하고선 재빨리 전기공학과 컴퓨터공학으로 전공을 바꿨죠.” 쉽지 않은 자각이었다. 물리학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있었음에도 자신의 한계를 직시했던 것이다.

-- 발명과 방황, 제프 베조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메타인지'다. 내가 어느 정도의 물에서 '머리' 역할을 하며 스스로의 효능감을 느끼고 성장할 수 있는지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능력 말이다. 나에게 맞는 연못을 찾는 지혜, 그것이 '용꼬리'와 '뱀머리' 논쟁의 핵심일 것이다. 돌고 돌아 소크라테스 선생님의 일갈로 귀결된다.

Know Yourself!
너 자신을 알라!

@codem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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