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 불교에서 윤회와 업은 방편이었을까?

@codemaru · September 02, 2025 · 12 min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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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학교는 미션 스쿨, 집안은 제사를 지내는 유교, 어머니는 기복 신앙으로 절에 다니신다. 그럼에도 성인이 된 나는 종교가 없다. 무교다. 대체로 많은 종교가 신을 상정하고 믿을 것을 강조한다. 믿음천국, 불신지옥 설파가 기본이다. 그런 대다수 종교와 불교가 조금 다른 점은 상당한 철학적 사유가 배경에 있다는 점 아닐까 싶다. 심지어 석가모니가 초기 불교를 설립하던 시절은 지금처럼 기복 신앙으로써의 불교를 만든 게 아니었다.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열반에 이르러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몇천 년 전 사람이 그런 사유를 했다는 것이 실로 놀랍기 그지없다. 내가 평생을 걸쳐 접한 모든 생각 가운데 가장 뛰어난 생각이 불교 철학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그런 불교 철학에서 유일하게 좀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윤회와 업이다. 윤회는 끊임없이 다시 태어난다는 개념이고, 업은 극단적으로 단순화하면 권선징악을 의미한다. 착한일 하면 상받고, 나쁜짓하면 벌받는다는 말이다. 살아보면 알겠지만 권선징악으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는다. 석가모니 시대에도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끊임없이 했을 것이다. 그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여기서 윤회로 확장한다. 즉, 나쁜일을 해도 이번 생은 무사할 수 있어도 다음 생에는 반드시 댓가를 치른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윤회와 업이 불편한 이유가 뭘까? 불교의 다른 부분은 상당한 연역적 사유에 가반하는데 이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그나마 권선징악은 연기의 개념을 차용해 확률적으로 생각한다손 치더라도 윤회쯤 가면 기복신앙과 다를게 뭔가 싶어지는 지점이다. 실제로도 불교 철학에서 윤회와 업의 개념은 불교 독창적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당시 선행 종교에 이미 있었던 개념이기도 했다. 그래서 현대의 사람들은 대체로 두가지로 해석한다. 1) 석가모니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시대적 배경을 무시할 순 없다. 2) 윤회와 업은 방편으로 설파한 것이다. 여기서 방편이란 사람들이 열반의 길로 보다 쉽게 가게 하기 위해서 본질은 아니지만 차용해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석가모니 입장에서는 내가 이 생각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너희가 이 생각을 따르면 그나마 쉽게 열반에 들 수 있다는 의미로 이런 개념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대체로 내가 지금까지 이해하던 불교의 세계관이다. 그러다 오늘 한 책을 읽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제 3의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시대적 배경도 아니고 방편도 아니고, 윤회와 업을 차용하지 않으면 굉장히 곤란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차용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일종의 외통수라 빠져나갈 길이 윤회와 업밖에 없었다는 설명인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 철학의 토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교 세계관의 시작은 무상에서 시작한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살펴보면 모든 게 변한다. 꽃이 피면 지고, 사람이 태어나면 죽는다. 달도 차면 기울고, 빅뱅에서 시작한 우주는 팽창하다 어찌될지 모른다. 변하지 않는 건 없다. 석가모니는 여기서 고를 끌어낸다. 모든 게 변하기 때문에 고통이라는 것이다. 왜 변하는 게 고통이냐면 내가 꽃을 좋아했는데 그게 계속 그 상태로 변하지 않고 있는 게 아니라 시들어 없어지기 때문이다. 즉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뭐가 됐든 내가 원하는 상태로 잡아둘 수 없고 계속 변하기 때문에 세상은 불만족,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불만족,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무아를 깨쳐야 한다고 말한다. 무아란 나의 실체적 자아가 없다는 말이다. 내 생각, 내 느낌, 내 몸, 어떤 것이든 나라고 생각하는 모든 게 사실은 환상이고 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거기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집착을 끊으면 변하는 것을 그저 변하는 상태로 관조하게 되고, 판단을 개입시키지 않기 때문에 고통이 사라진다고 설명한다. 무아를 좀 더 심도있게 연역하기 위해서 연기와 공이 끌려 들어온다.

이게 기본적인 큰 토대다, 무상, 고, 무아로 이어지는 사유 체계. 지금까지 여기 굳이 업과 윤회가 필요한가 싶었다. 그저 종교적인 색채를 보강하는 결함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무상, 고, 무아로 이어지는 사유를 할 수도 있지만, 무상, 고, 반출생주의로 갈수도 있다는 점이다. 즉 세상은 무상하고, 내 뜻대로 안되는 고통으로 가득차니 출생 자체가 문제였고, 그걸 죽음으로 롤백 시키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발전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사실상 이렇게 빠지는 생각을 불교 세계관으로는 막을 방법이 없다. 실컷 무상, 고를 설파했는데 무아로 가는 게 아니라 자살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이걸 막기 위해서는 윤회가 동원될 수 밖에 없다. 윤회는 죽어도 끝이 아니라는 의미기 때문이다. 죽으면 끝이 아니라 재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를 설정하면 자살로 이어지는 생각을 막을 수 있고, 어떻게든 무아를 깨쳐서 열반에 이르러 윤회의 수레바퀴를 탈출해야 한다는 불교의 대서사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1

이상 아침에 책 조금 읽고 심취해서 썰을 풀은 한 인간의 환각이었고, GPT-5에 따르면 윤회를 동원하지 않고도 불교 자체적으로 반출생주의로 빠지지 않는 논리 기반은 있다고 한다.

상견(常見): 죽어도 영혼/자아가 계속 존재한다.
단견(斷見): 죽으면 모든 게 완전히 사라진다.

두 주장 모두 "자아(ātman)"라는 항을 가정한다.
그러나 무아 논증(오온 무상·무아, 연기 법칙)에 따르면 항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두 극단적 결론은 전제 자체가 붕괴한다.

대승불교, 특히 용수(龍樹, Nāgārjuna)의 『중론』에서는 더 체계적으로 전개된다.
모든 주장은 자성(自性, 본질적 실체)을 전제한다.

하지만 연기(조건적 발생)라는 구조에 따르면, 자성은 모순이므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태어나서 고통받고, 죽으면 끝"이라는 서술도 결국 자성 개념에 기대므로 부정된다.

결국 두 논리 모두 죽으면 끝이라는 말 자체도 자아가 존재할 때 성립될 수 있는데, 자아라는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논증했기 때문에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는 논리인 것 같다. 이렇게 쉽게 정리되는 걸 보면 애초에 윤회와 업은 방편이 맞았나 싶기도?!

#2

불교의 놀라운 점은 그 똑똑하다는 양자 물리학자들이 절로 찾아오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대체로 양자 물리학에 심취하면 이 세계에 대한 붕괴 내지는 모순 같은 것들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때 철학적 피안처를 제공하는 게 웃기게도 불교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양자 불교론이라는 세로운 장르가 나타나기도 한다. 실제로 양자 중력 이론으로 유명한 카를로 로벨리의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보면 끝머리에 동료 추천으로 용수를 접했다는 내용이 있다. 용수는 대승불교 철학자로 연기와 공 사상을 체계적으로 논증한 사람이다.

몇천 년 전 한 인간의 사유 체계가 이토록 발전한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은 정말 경이로움 그 자체 아닌가 싶다.

@codem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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