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 낳음 당했다에 부쳐

@codemaru · September 17, 2025 · 8 min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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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를 보다가 요즘 애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낳음 당했다는 말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표현을 보면서 요즘 애들은 참 똑똑하다, 라고 생각했는데 SNS 상의 어른들 반응은 대체로 요즘 애들 1) 무섭다 2) 버릇없다 3) 어떻게 그런 말을 4) 우리 애가 그럴까 겁난다와 같이 부정적이었다. 과연 낳음 당했다는 말을 꼭 그렇게만 볼 일일까? 애들이 하는 철없는 말로 치부하기에는 생각보다 거기에는 더 많은 함의가 내포돼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1

그 표현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쇼펜하우어였다. 요즘은 좀 시들해졌지만 한동안 서점가를 쇼펜하우어가 점령했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보기에 낳음 당했다도 일정 부분은 거기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사유의 근간이 인생을 고통으로 보고 낳음 당했다와 유사한 논지를 피력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생존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든 자신에게 부과된 강제노동을 치르는 것과 같다. 이러한 부채를 계약한 것은 성적인 쾌락을 얻는 것을 대가로 하여 그를 낳은 사람이다. 이처럼 한 사람이 즐긴 대가로 다른 한 사람은 삶을 살아야 하고 괴로워해야 하며 죽어야 하는 것이다.

--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박찬국

위 내용만 보면 쇼펜하우어의 기본적인 생각이 요즘 애들이 한다는 낳음 당했다는 말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그리고 나는 저 기본적인 사고의 흐름이 그렇게 잘못됐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부모로써 자식에게 기본적으로 잘해줄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일종의 저런 좋류의 부채 의식이 무의식 중에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2

쇼펜하우어만큼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실존주의 철학도 낳음 당했다와 유사한 지점이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이 세계에 던져진 존재라고 표현했다. 이 말은 우리가 태어날 시대, 장소, 가정, 언어 같은 조건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는 이미 이 시간, 이 공간, 이 세계 속에 들어와 있다는 점이다.

게임 캐릭터를 만들어서 입장하는 세계를 상상한다면 아마 지금의 나를 그대로 캐릭터로 만들어 들어오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실존주의가 말하는 이미 주어진 조건과 아이들이 말하는 낳음 당했다는 감각은 분명 접점이 있다.

#3

카뮈는 던져짐과는 조금 다르게 부조리란 개념을 말한다. 부조리는 이 세계는 내가 어떠한 의미를 찾으려 해도 응답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성실하게 일했는데도 회사 사정으로 하루아침에 구조조정을 당한다거나, 선하게 살아 보상받고 싶었지만 그 보상은 오지 않는다거나, 오래 마음을 쏟았지만 상대의 감정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거나, 온 힘을 들여 만든 작업은 조용히 사라지고, 가볍게 한 결과물이 우연히 주목받는다거나 하는 일들이다. 간절히 기도하고 약속해도 세계는 아무 대답을 주지 않는다.

이 세계 자체는 철저하게 나의 의지와는 아무 관련이 없이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면 부조리해 보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거기엔 어떠한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부조리의 감각은 아이들이 말하는 낳음 당했다, 와도 일부 맥락을 공유한다. 둘 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조건에서 출발하고, 내가 세운 의미나 기대가 세계에서 아무 보증도 받지 못한다는 체감을 드러내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4

이런 철학적 개념들을 쭉 살펴보면 애들이 말하는 낳음 당했다는 말이 그저 버릇없이, 감히 부모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처럼 가볍게 넘길 말은 아니지 싶다. 그들은 지금의 상황을 선택하지 않았고 그 상황 속으로 내던져졌고, 그들에게 현 상황은 한없이 부조리하고,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상황을 만든 장본인들은 다름 아닌 순간의 쾌락을 선택한 그들의 부모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모든 걸 한마디로 퉁치면 결국 낳음 당했다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낳음 당했다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해줘야 할 이야기는 무엇일까? 내던져진 상황에서, 부조리한 세계에서, 또는 고통 뿐인 삶을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나가야 하는 것인지를 알려줘야 하는 건 아닐까? 쇼펜하우어도, 하이데거도, 카뮈도 각자의 답을 했지만 사실상 정답은 없다. 어쩌면 답을 말해주기 보다는 상황 인식을 공감해 주는 게 더 큰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걸 듣는 부모조차도 부조리한 세계 속으로 그저 던져졌고, 그 결과로 고통인 삶을 살아가는 똑같은 사람이니까 말이다.

@codem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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