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대학때 무용과 친구를 알고 지냈던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입시 학원 선생님께 거의 맹종하고 있었는데, 내가 한 날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레슨을 받으면 니가 갑인데 어떻게 그렇게 쩔쩔 메냐고 말이다. 그때 그 친구가 한 이야기가 다소 충격적이었다. 통상 입시 학원을 다니면 선생님이 무용 음악을 지정해 주는데 그게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즉, 그 선생님과 그 학교 심사 위원 사이에 카르텔이 있고, 그 정보 교환을 선정곡으로 한다는 맥락의 의미였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당시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아, 블라인드 테스트다 뭐다 온갖 장치를 만들어 본 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는 세상이구나 싶었다. 그 친구가 입시를 지나서도 계속 맹종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좁은 이너 서클에 끼기 위해서는 그 선생님과의 친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특정 음악을 통해서 평가가 진행된다는 걸 보면 해당 분야가 본질적인 실력보다는 특정 인맥과 연관된 네트워크가 중요함을 보여준다.
#1
예체능이 아닌 분야도 이런 사례는 있다. 한 친구는 10년째 박사학위 논문으로 씨름 중이다. 같은 논문만 세 가지 버전을 썼는데 담당 교수는 논문을 읽지도 않고 계속 다시 쓰라고 한다고 하소연 한다. 심지어 그 교수가 자기 챗지피티가 이런 부분이 잘못됐다고 고치라고 그걸 카톡으로 보내줬다고 한다. 내 챗지피티라는 표현도 웃긴데, 본인이 판단해야 할 부분을 전적으로 위임한 것도 모자라 그걸 자기 의견인양 표현하는 최소한의 예의도 없이 거침없이 말한다는 것도 다소 어이없긴 했다. 아니면 벌써 챗지피티가 그 정도의 권위를 획득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친구에게 내가 박사 과정을 안해봐서 모르겠지만 혹시 교수가 원하는 다른 게 있는 거 아니냐는 말을 했다. 그러니 말도 안되는 논문의 내용이 아닌 그래프를 3차원으로 그려라 따위를 지적질 하는 거 아니냐고. 심지어 그 그래프는 3차원으로 그리는 형태의 그래프가 아니다.
이 친구와 정반대의 사례도 있다. 교수에게 정부 고위 관료들과의 만남 자리들을 주선하고 아주 쉽게 박사 과정을 진행한 사례. 그 교수에게는 이 사람의 경우 졸업을 하고도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잘해주는 건지도 모른다.
이 두 사례를 보더라도 학문 분야도 담당 교수의 역할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또한 그 지도 교수의 역할이란게 대체로 그 교수의 기분과 판단에 의존한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2
내가 직접 경험한 사례도 있었다. 애가 어릴 때 하도 성화라 강남에 연예인 육성 학원에 오디션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나름 그 바닥에서 입지가 있는 학원이었다. 입구부터 누구를 어디 출연했는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심지어 우리는 양반이었다. 어디 들어보지도 못한 지방에서도 새벽 차를 타고 올라온 사람들이 부지기수 였기 때문이다. 그런 곳을 처음 가봐서 나름 충격적이었다. 아, 이렇게 아이가 연예인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구나 싶었다. 그리고 약간의 테스트 아닌 테스트를 하고 설명이 이어졌다.
내가 보기에는 딱봐도 그냥 약장수 같아 보였다. 연예인이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그나마 방송에 출연 시키는 원리는 인맥이나 카르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걸로 보였다. 일단 대사도 없는 아역의 경우 누가 나오든 별반 차이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담당 권한을 가진 사람과 아무래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 추천하는 사람을 쓸 가능성이 높을테니 말이다. 실제로도 광고한다고 걸려 있는 면면을 봐도 대다수가 그런 사례 밖에는 없어 보였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끼만 있으면 찍어서 유튜브 올리면 연예인 하기 싫어도 연예인 되는 세상이라고 말렸던 기억이 난다.
#3
입시 학원 선생님, 지도 교수, 방송국 연줄이 있는 학원 원장들을 살펴 보았다. 물론 그것도 그들의 능력이겠지만 이렇게 딱히 본질적인 이유가 아닌 걸로 길목을 지키고, 그 길목을 지나가는 데 통행료를 받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통상 게이트 키퍼라고 부른다. 나는 어렸을 때 부터 반골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이런 역할을 다소 싫어했다. 그래서 전 인생을 통틀어 게이트 키퍼를 피하려고 했다. 내가 마주한 게이트 키퍼는 병역특례 회사 입사가 필요할 때의 면접관을 제외하곤 없었다. 그마저도 그들을 마주치지 않고 해결하는 방법이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세상은 점점 편평해지고 있다. 위에도 언급한 것처럼 요즘은 실력만 있으면 누구나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다. 실상 인플루언서와 연예인의 간극도 좁아지고 있다. 방송국 입성보다 유튜브 구독자 떡상을 더 높게 치는 세상이니 말이다. 물론 아직 일부 라이선스 직종에 게이트 키퍼를 아예 피할 수가 없는 세상도 있다. 그럼에도 예전에 권한을 가졌던 많은 부분이 기술의 발달에 따라 권한이 사라졌다.
방송국에 출연하지 않아도 유튜브에 찍어 올리면 전세계 수억 명의 사람에게 동시 송출이 된다. 가장 높은 권한 중의 하나였던 화폐 발권 권한도 민간이 가져가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누구나 멋진 아이디어가 있으면 관련 내용을 인터넷에 업로드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새로운 세상도 게이트 키퍼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알고리즘이 그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알고리즘은 인간에 비해 변덕이 덜하고, 기분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며, 결정적으로 대체로 모두에게 공평하게 동작한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요즘은 이런 공정성이 훼손되는 경우에는 심사 대상이 되기도 한다.
#4
결론은 이렇다. 유기체 게이트 키퍼를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그런 게 엮인 상황은 결과가 나의 기본 능력 보다는 다른 것에 좌우되거나 상대의 기분, 변덕에 따라 좌지우지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입사 면접의 경우는 불특정 다수의 게이트 키퍼에게 노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분산 투자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서 그 경향이 덜하다. 하지만 지도 교수는 거의 올인급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해당 담당 교수와 맞지 않는다고 변경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후배 중에는 담당 교수의 불법을 고발했다 결국 졸업을 하지 못하고 수료한 친구도 있었다. 잘못은 교수가 했는데 피해는 그 친구가 본 것이다. 그러니 이런 식의 올인급 게이트 키퍼는 대체로 마주하지 않는 편이 좋다.
아예 이런 원칙이 불가능한 분야도 있다. 그런 분야라면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내가 인간 게이트 키퍼의 변덕과 기분을 뛰어 넘을 정도로 탁월한지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분야를 바꾸는 게 낫다. 내가 탁월한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냐고? 그런 질문을 가졌다면 안타깝게도 탁월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모차르트에게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교향곡은 어떻게 쓰는 건가요?"
이에 모차르트는 차분하게 대답했습니다.
"자넨 아직 교향곡을 쓰기엔 너무 어리다네."
젊은이는 당황하며 말했죠: “하지만 당신은 10살 때부터 교향곡을 쓰셨잖습니까!”
그러자 모차르트가 웃으며 답했습니다:
"그랬지. 하지만 난 남에게 방법을 물어보진 않았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