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경쟁력 없다와 외람되다 사이에서

@codemaru · September 11, 2025 · 9 min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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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오래 전이었던 것 같다. 어느 회사나 그렇겠지만 특정 시기마다 뭐에 홀린듯 이상한 문화를 한번씩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 특정인의 바램 때문일수도 있고, 구성원 모두의 기운이 그쪽으로 몰려서 그럴 수도 있겠다. 어쨌든 당시에 우리는 세미나에 홀려 있었다. 그것도 전사 세미나.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돌아가면서 한번씩 주제 발표를 하는 그런 전사 세미나였던 것 같다. 당시에도 이게 뭔 의미일까 싶었지만 지나고 봐도 솔직히 큰 의미는 없었다. 그리고 그 세미나를 했던 대다수 인원은 지금 회사에 없다. 그렇게 꽤나 오랜 기간 당시에는 전사 세미나를 했는데 우습게도 그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세미나와 전혀 관련 없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보통 발표자가 발표를 하고 Q&A 하고 나면 대표님께서 한 말씀 하는 그런 느낌으로 흘러갔던거 같은데 당시 대표님께서 뜬금포로 우리 회사 경쟁력이 뭐냐고 물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안봐도 비디오처럼 답해야 하는 쪽의 반응은 쎄했다. 아무도 뭐라 말하지 못하고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고, 보다 못한 대표님께서 특정인을 지목했다. 이럴 때 지목되는 건 보통 힘없고 나약하며 부서지기 쉬운 막내인 경우가 많다. 당시 정확히 막내는 아니었지만 얼추 그 근방에 있는 개발실 직원이 호명됐고, 그 직원은 의외로 호기롭게 대답했다. 우리 회사는 경쟁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띠용~~ 뭐 어쨌든 마무리는 됐고, 그 직원은 이어진 뒤풀이 회식 장소에서 대표님 옆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핀잔을 조금 듣긴 했다.

그 여러차례의 세미나 기간 중에 내가 유독 이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이 장면이야말로 나는 우리 회사의 경쟁력을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작 20명 남짓한 직원을 가진 회사에서 -- 직원이 작을수록 대표는 더 하늘같은 존재가 된다 -- 대표가 전직원 앞에서 회사 경쟁력이 뭐냐고 묻는데 거침없이 한치의 거짓 없이 아주 솔직하게 경쟁력이 없다고 답할 수 있는 회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건 달리 말하면 진실을 말해도 아무런 불이익도 없다는 강려크한 신뢰가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 의견을 뒤풀이 때도 이야기 했지만 동의하는 사람은 1도 없었다.

이후 그 직원은 당연히 어떠한 불이익도 받지는 않았고, 국내 굴지의 게임 회사로 성공적으로 이직했다. 또한 그만둘 때 나에게 오픈소스 개발 같은 걸 해서 돈을 벌어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실제로 그걸 이뤄낸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존경한다. 그때는 몰랐지만 경쟁력 없다고 답할만큼 떡잎부터 다른 친구긴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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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아주 많이 흘렀다. 당시와 직원도 많이 바뀌었다. 여전히 있는 고인물들도 있지만 거의 절반 넘게는 모두 새로운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그러던 어제 묘하게 그때 사건이 생각나게 하는 일이 있었다. 한 직원이 내가 올린 이슈 트래커 댓글에 대댓글을 달았는데 외람되지만... 이라면서 내용을 단 것이다. 그 직원 입장에서는 내 의견에 반박하는 내용이라 조심스러웠을 수도 있고, 올릴까 말까 고민했을 수도 있고, 챗지피티에게 직장 상사가 화나지 않게 써달라고 부탁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외람되지만... 으로 시작되는 글을 보면서 경쟁력 없다고 말했던 그 직원이 떠올랐다.

대부분의 이슈라는게 해결되기 전까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문제기 때문에 진행 중일 때에는 뭐가 문제인지는 오리무중인 경우가 많다. 또한 그 직원은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회사에서 보기 드물게 논리적으로 일하는 직원 중에 한명이다. 그리고 그 외람되지만... 으로 올린 내용 중에 틀린 내용도 없었고, 이후에 올린 내용을 봐도 대체로 그 직원은 상황을 전체적으로 잘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졌다. 그 글에 답을 달고 일단락이 됐지만, 내심 마음 한켠에 불편함이 있었다. 그래서 국어 사전에서 외람되다는 말을 찾아봤다.

외람되다 adj 하는 짓이 분수에 지나치다.

찾아보고 나니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맞는 말이든, 틀린 말이든 어쨌든 자기 생각을 올리는 일에 분수에 지나친 경우는 없을테니 말이다. 그 친구가 그 내용을 올리기가 그만큼 힘들었다는 걸 대변하는 게 아닐까라는 조심스런 추측만 해봤다.

#2

웃기게도 외람되지만... 으로 글을 쓴 친구를 보면서 경쟁력 없다고 답했던 친구로부터 회사 경쟁력이 그 차이만큼 없어진 건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왜냐하면 관리자 입장에서 가장 두려운 건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 또는 불편한 진실들이 은폐, 왜곡되는 거니까 말이다. 지금은 외람되지만... 이지만 조금 더 지나면 말해봐야 뭐하겠어가 될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모두가 자유롭게 본인들의 생각과 의견을 얘기할 수 있는 회사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다. 설령 그게 특정인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회사의 경쟁력은 좋은 의사 결정이 쌓이는데서 비롯되고, 좋은 의사 결정은 진실이 왜곡되지 않고 모두 전달될 때 만들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글을 다 쓰고 생각해보니 그 외람되지만... 을 썼던 친구도 엄청 호기로웠던 적이 있었다. 대표님께서 연말 회식 때 건배사를 하라고 시켰는데, MZ는 건배사를 하지 않습니다로 퉁친 유일한 직원이었기 때문이다. 대리 진급을 앞두고 있는 그 직원이 성공적으로 승진하기를, 그리고도 오래오래 근무하기를 희망해본다.

@codem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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