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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어느 날 중고등학생 때 썼던 일기장을 모두 버린 기억이 있다. 본가에 두고 온 일기장을 누나가 읽었다며 놀린 게 계기가 되었다. 그 얘길 듣고 그걸 전부 자취방으로 가지고 왔었다. 내가 다시 읽어봐도 워낙 오글거려서 그날로 다 버렸다. 그때는 몰랐다. 데이터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 글들이 내가 유일하게 추억할 수 있는 그 시절 나의 생생한 모습이란 사실도 말이다.
일기장을 버린지 근 20년이 되어간다. 가끔 그때 버린 일기장이 기억날 때가 있다. 오글거리긴 해도 가끔 그시절 내가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고민을 했는지가 궁금할때가 있는 것이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일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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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이글루란 블로그 서비스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들렸다. 어렸을 때 그곳에 적잖게 글을 썼던지라 들어가 보았다. 2004-5년 학생 시절에 쓴 글들이 많이 있었다. 웃기기도 하고, 이렇게 살았구나 싶기도 했다. 같은 실수를 두번하지 않기 위해서 이번에는 데이터가 삭제되기 전에 모두 백업을 했다.
#2
이 블로그를 시작할 때만해도 내가 이걸 8000일이 넘는 시간동안 운영하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조금 아쉬운 점은 자작 게시판, phpBB, 태터툴즈, 워드프레스, 지킬을 거치면서 얼마간은 데이터가 유실되었다는 점이다. 예전엔 데이터가 소중한지도 몰랐었고, 나중에 그게 아쉬울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런 일들을 겪고 보니 이제라도 한번 전체를 다시 재정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에 파편화되어 있던 글들을 한곳에 다 모으기로 했다. 대체로 모을 수 있는 모든 글들을 모았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글들은 다시 다듬었다. 소위 블로그 리마스터링이라고 부를만한 작업을 했다.
#3
작업을 하기에 앞서서 gatsby 템플릿을 변경할 필요가 있었다. 기존 템플릿이 너무 단촐해서 글을 너무 많이 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다. 여기저기 구경하던 중 hudi 님께서 만든 템플릿이 좋아 보였다. 디자인도 멋지고, 반응형에, 태그와 시리즈를 지원하는 멋진 템플릿이었다.
템플릿을 교체하는 과정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gatsby에 g도 모르는 입장이라 오류가 발생하면 뭐가 문제인지도 몰랐으나 오류 메시지를 복붙하면 대체로 ChatGPT가 다 해결해 주었다.
기존 글들을 정리하면서 느낀 가장 큰 재앙은 오래된 글에 있는 링크는 거의 모두 사라졌거나 동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퍼가는 사람들이 왜그럴까 했는데 이해가 되는 지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체로 기존 링크를 유지할 수 있으면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이 기능도 템플릿을 고쳐서 가능했는데 gatsby의 유연한 시스템과 ChatGPT의 어시스트로 가능했다. 어쨌든 기본적인 프레임워크는 다 준비된 것 같아서 이제 글을 옮기기로 했다.
#4
시작은 최근 데이터부터 시작했다. 단순 무식하게 카피앤페이스트로 지킬의 데이터를 다 옮겼다. 이것도 수작업으로 하니 생각보다 힘든 작업이었다. 그리고 남은 글들을 보았다. 워드프레스와 태터툴즈만 합쳐도 1000개가 넘는 글이 남아 있었다. 와 이거 노답인데 하는 생각도 순간, 나에게는 ChatGPT가 있었다.
자동으로 긁어서 마크다운으로 변환해서 파일로 저장하는 스크립트를 작성하라고 시켰다. ChatGPT는 나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녀석이 작성해준 코드는 기가 막히게 동작했고, 나는 제로 콜라 하나를 다 마시는 동안 모든 페이지가 마크다운으로 변환되는 기적을 맛보았다.
그러고 나니 텍스트는 거의 다 저장되었는데 페이지에 포함된 이미지가 문제였다. 다시 ChatGPT에게 물었다. 녀석은 마크다운으로 변환하는 페이지에 포함된 이미지까지 모두 다운로드 받아서 저장해주는 스크립트를 안겨주었다. 올레~
#5
물론 23년 가까이 쓴 글들은 지금 돌아보면 우습고 부끄럽고 이불킥하고 싶은 글들이 많다. 하지만 그런 것들도 다 나의 일부라 생각하고, 추억이기에 보존하기로 했다.
그렇게 모아진 글들만 1200개가 넘는다. 없애지 않고 지금까지 잘 보존해준 과거의 나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그덕에 나는 존경해 마지 않는 레이몬드 첸 아저씨보다 블로그를 오래한 몇 안되는 프로그래머 중에 한 명이 되었다.
#6
나는 더는 스타크래프트를 즐기지 않고, 와우를 미친 듯이 하지 않는다. 킹 오브 파이터즈를 하러 오락실을 찾지도 않고, 무한도전이나 러닝맨 같은 예능을 즐겨 보지도 않는다. 일요일 밤을 마감하는 웃찾사나 개그콘서트같은 개그 프로를 안 본지도 오래됐다. 과자를 자주 먹지도 않는다.
긴 세월 만큼이나 나란 사람도 정말 많이 변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세월이 지났어도 나는 여전히 여기에 글을 쓴다. 어쩌면 이게 내가 코딩을 제외하고 본질적으로 거의 유일하게 좋아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춤했던 최근을 넘어서 앞으로는 그래도 종종 글을 남기겠다는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