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백수생활백서

@codemaru · January 09, 2009 · 8 min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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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였다.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집을 나섰다. 점심 시간이었다. 죽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앞 죽집에 가서는 평소 좋아라하는 죽을 하나 시켰다. 그리고는 신문이 없나 두리번 거렸다. 반납하려고 들고간 3권의 만화책을 다시 들추었다. 본 걸 금새 다시 보니 시시했다. 결국은 하는 수 없이 구석에 있는 레이디경향이라는 여성 잡지를 들었다. 죽이 나오기까지 제법 걸려서 한 페이지 씩 넘기면서 광고도 보고, 인터뷰가 있는 면은 인터뷰도 보고 하고 있었다. 그러다 "당신의 2008년은 ..."하는 글을 보게 되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에 대한 글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이듦에 대한 글이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을 이렇게 오롯이 지면에 옮겨 두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도 참 잘 썼다. 누가 썼는지 궁금하여 작가 프로필을 보는데 학교 선배가 아닌가. 순간 나중에라도 그 분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보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책은 두 권이었다. 그 중에 하나 "백수생활백서"를 선택했다. 백수생활백서의 주인공은 28살의 책읽기를 좋아하는 여성 서연이다. 연령부터 그녀의 성격 생활 방식등을 보고 있느라면 마치 정말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많이 들었다. 특히 아래와 같은 부분을 읽을 때는 서연이라는 주인공이 마치 또 다른 나 자신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우리의 유일한 꿈이라면 나는 하루 종일 빈둥거리면서 책을 읽는 것이고 유희는 영화를 실컷 보는 것이다. 생산자로서의 꿈이 아니라 소비자로서의 꿈이다.

나는 사람들이 연애를 하고 싶어 하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 나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즐거웠다. 남자들은 어리석게도 잘난 체하길 좋아하고, 거기에 단순히 응, 그래, 하고 장단을 맞추어주는 것만으로 피로했고, 데이트라면 근사한 이벤트가 있어야 하는 걸로 착각하는 그 유치함이 무엇보다 끔찍했다. 영화관이나 놀이 공원은 필수 코스였고 겨울 바다의 세찬 바람 속에 서 있거나 허허벌판에서 밤새도록 망원경으로 유성을 들여다보아야 했던 적도 있었다. 나는 조금도 재밌지 않거나 조금 흥미로웠으나 금새 지루해지곤 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늘 똑같은 짓의 반복이었다.

소설의 전체 줄거리는 서연의 단편적인 생활을 모아둔 것이다. 그래서 복잡한 갈등도, 그것이 해소되는 과정도 없다. 무덤덤하게 진행되는 것 같지만 소설에 인용된 많은 다른 좋은 소설, 영화의 내용들, 그리고 아래와 같은 유치하지만 조금은 웃긴 개그들이 2% 부족한 긴장감을 충분히 메운다.

-- 어차피 네가 제일 먼저 읽을 거니까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쓰려고, 안 되니?
-- 눈물 나게 고마운데 말이야. 그럴 필요 없는 거잖아. 네 소설은 무슨 주문 제작 방식이니?

... 창녀도 저렇게 멋진 남자를 만나서 사랑을 받는데 나는 왜 혼자인 거냐고. 내가 말했다. 넌 줄리아 로버츠가 아니잖아.

-- 그런데 감기는 언제 나을 계획이니?
-- 글쎄, 그건 감기의 계획이라서 잘 모르겠다.

20살, 나는 소설같은 삶을 꿈꿨다. 그 나이는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시절이니깐. 20대의 끝무렵에서 내가 느낀 사실은 내 삶은 사실 소설만큼 멋있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화려한 등장인물도, 스펙터클한 스토리도, 눈물이 펑펑 쏟아질만큼 아련한 사연도 없었다. 어쩌면 그런 곳에서 느끼는 미세한 괴리감이 요즘 나를 괴롭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에게 "백수생활백서"의 주인공 서연이는 다음과 같은 진지한 충고를 해준다.

소설이 될 만큼 멋진 인생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시시한 인생이라도 한 번쯤은 소설이 되어도 좋지 않은가, 라고 여긴다. 채린은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아무리 연애소설이 흥미진진하다고 해도 자신이 하는 진짜 연애보다 흥미로울 수는 없다고, 그리고 유희는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책을 읽는 일이 아무리 재밌다고 해도 쓰는 일만큼 재밌을 수는 없다고, 요즘 들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제일 아름다운 책들보다도 더 아름다운 인생이 있는 법이고 책이 아무리 재밌다고 해도 인생만큼 재밌을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이제는 조금은 따뜻한 사람, 남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연의 특별하지 않은 인생 이야기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 그런 책이었다.

@codem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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