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 누가 성장 했을까?

@codemaru · April 19, 2022 · 15 min read

회사를 시작하고 직원을 채용하고 그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불만 사항중에 하나는 방목이다. 나는 꼰대라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지만 직원들은 회사가 본인들을 충실하게 교육시켜서 연차에 알맞게 총총 성장을 시켜주길 바라는 것 같다. 물론 나도 그런 생각을 안해본 사람은 아니다. 창업을 했던 초창기에는 어렸고, 열정이 있었다. 밤을 새면서 A부터 Z까지 알려주려고 해본 적도 있었다. 응당 개발 속도는 달팽이보다 느려졌다. 그때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내이면서 자기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그 속도로 가다간 멀리는 고사하고 당장 한두달만돼도 굶어죽을 것 같았다. 속도도 느렸지만 품질도 문제였다. 충실하게 A부터 Z까지 교육을 받고 만든 친구는 성장했을지 모르겠지만 회사는 제자리였다. 아 이렇게 해서는 달은 고사하고 대기권 통과도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결국 나는 방목을 택했다. 할 수 있는 것들만 시켰고, 못한다는 것은 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개발 속도가 올라갔고 몇해가 지났다. 사내 이슈 트래커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로 가득찼고 제법 오래 일한 직원들과 이야기를 했다. 돌아온 답은 방목. 교육을 받지 못해서 직원들이 성장을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주된 문제점은 쉬운 문제들은 연차가 쌓인 사람들이 다 빨리 해버리고 나니 어려운 문제만 남아서 아무도 해결을 못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래서 쉬운 이슈들을 처리하면서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솔루션이 나왔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볼까? 회사가 그렇게 배고픈 시절은 아니었기에 해볼만한 시점이기도 했다.

쉬운 일감들이 할 수 있을만한 사람에게 스스로 배정되었고, 그들은 차곡차곡 문제를 해결하고 코드를 제출했다. 나는 빨간펜 선생님처럼 리뷰를 하고 머지를 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과정은 아름다웠지만 속도는 거의 그린란드 상어가 성장하는 속도만큼 느려졌다. 그래도 이 시기만 거친다면 직원들이 충분히 성장할거란 기대를 해보았다. 그렇게 제법 오랜 시간을 우리는 아주 느려터졌지만 개발 교과서에 나오는 우아한 방식으로 업무를 진행해 보았다. 결과는 당황스러웠다. 내가 봤을 때는 방목일때나 빨간펜일때나 성장의 속도와 범위는 비슷한것처럼 보였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그 아름다운 시기를 함께 경험한 직원들 중 지금까지 근무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지켜보고 이 방법 저 방법 해보고 내린 결론은 이렇다. 누가 성장했을까? 1) 회사 업무와 관련된 도메인에 관심이 있는 사람 2) 자기 동기부여가 되는 사람 3) 주도적으로 업무 처리가 가능한 사람 4) 열린 마인드를 가진 사람 5)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성장했다.

우리는 게임 보안 회사다. 입사 후에 가장 많은 성장과 기여를 한 친구들을 보면 대체로 입사 전부터 게임 보안에 관심이 있거나 그런 쪽의 작업을 한 친구들이 많았다. 사전에 관심이 많았다는 이야기는 스스로 학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담보하기도 하고, 입사 시점부터 경력직과 비슷한 효과를 가지기도 한다. 역대 입사한 직원들을 모두 나열해놓고 기여도가 높은 순서대로 정렬을 해본다면 거의 이 순서와 동일한 순서가 나온다. 그러니 애초에 도메인에 관심이 있다는 건 그 사람이 입사 후 성장할 가능성이 높이다는 가장 강려크한 지표 중에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회사란 공간은 칭찬은 인색하고, 평가는 냉혹하다. 이런 환경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자기 동기부여가 되는 사람들이 유리하다. 우쭈쭈해줘야 뭔가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오래 버티기가 힘들다. 또한 계속 우쭈쭈하기도 힘들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생각으로 그런 걸 남발하면 종국에는 고등학교 써클의 축제 출품작 같은 결과물을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니 스스로 동기부여가 되는 사람들을 찾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

주인 의식을 가지자는 말도 꼰대의 대표적인 언어가 된 요즘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장하는 직원들은 대체로 주도적인 업무 처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회사에 남겨진 대부분의 좋은 유산들은 회사에서 어떤 어떤 업무를 강제로 시켜서 남겨진 것은 거의 없다. 실무자들이 업무를 진행하면서 본인이 불편을 느끼거나, 다른 사람들이 업무 진행하는 것을 보면서 답답한 마음에 만든 것들이 남겨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도적인 업무 처리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체로 시킨대로 하거나, 현재 상태에서 개선을 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성장 기회를 얻을 가능성이 제한적이다.

요즘 개발자 면접을 보면 이런 말을 꼭한다. 우리 회사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심지어 지금은 말은 안했지만 나중에는 이만저만한 업무도 해야 할 수 있다. 구직자들이 극혐한다는 풀스택 이야기다. 나는 그들을 혹사시키려고 이런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 회사라는 것이 언제 어떤 업무를 하게될지 모르기 때문에 애초에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입사 후 성장한 친구들도 살펴보면 대체로 열린 마인들을 가진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테스터니까 테스트만 하겠다 라든지, 나는 C++ 개발자니까 C++만 하겠다는 친구들은 그렇지 않은 친구들보다 성장 범위가 제한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개인적인 경험에서도 다양한 개발을 해보는 것이 도움이 됐다. 왜냐하면 다른 분야나 시스템에서 좋은 것들을 배우게되면 원래 알던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제법 유명한 이야기지만 깊이 파기 위해서는 애초에 넓게 파기 시작해야 한다. 물론 레이저는 예외다.

끝으로 긍정적 사고다. 긍정의 배신과 같은 책들도 있지만 어쨌든 긍정적 사고는 본인 내부에 가진 에너지를 보다 오래 보존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보안이라는 업무를 오래 하다보면 현타가 오는 시점이 있게 마련이다. 매번 대응 한다고 해도 해킹툴은 쏟아지고, 고객들의 불만은 미어터지고, 지원팀의 압박은 거세다. 나에게 감사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사실 그런 일들은 입사 시점부터 있어 왔겠지만 현타가 오는 시점은 본인에게 있던 긍정성이 고갈되는 순간인 경우가 많았다. 성장은 고통을 수반하고, 고통의 과정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결국 긍정 에너지가 어느 정도 필요 조건이 아닐까 싶다.

이제 방목과 교육을 다시 생각해본다. 도메인에 대한 관심, 자기 동기부여, 주도적 업무처리, 열린 마인드, 긍정적 사고와 같은 것들이 교육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개인의 취향, 성격, 태도, 기질과 굉장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행하게도 이런 종류의 것들은 입사 전부터 결정된 것들이고, 입사 후에도 변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달리 말하면 어이없게도 성장할 사람은 입사 시점에 이미 거의 다 결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방목을 하든, 교육을 하든, 애자일을 하든, 코드리뷰를 하든, TDD를 하든, 세미나를 하든 하지 않든 말이다. 그 모든 것들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진짜 성장하는 사람은 그런 것들과는 상관이 없을 확률이 높다. 물론 애초에 좋은 기질을 가진 사람들에게 적절한 환경이 주어진다면 부스터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미치는 영향력은 이러한 기질적 특성보다는 작은것처럼 보였다.

결국 인사가 만사고 채용이 중요하다는 관점에서 이 사실을 역으로 적용하면 이렇다. 도메인에 관심이 있어 보이는 똑똑한 사람을 뽑는게 최선이다. 나머지 것들은 알아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면접 과정에서 알아내기란 몹시 어려운 부분에 속한다. 반면에 수습 기간에는 알아낼 확률은 높아지겠지만 3년도 아닌 3개월로도 실상 알기가 어렵다. 어쨌든 면접 및 수습 과정을 통틀어 최대한 이 5가지 항목을 잘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개인의 관점에서 이 사실에서 한가지 교훈을 얻자면 똑같은 개발을 하더라도 관심있는 도메인이 어디인지는 한번쯤 생각해 보는게 도움이 된다는 점일 것이다. 평생 게임이라곤 한번도 안해본 사람이 게임 회사에 취직하는 것도, 주식은 도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HTS 개발하는 업체에 취직하는 것도 고역일 것이고, 거기서 본인이 성장하기는 정말 어려울테니 말이다. 딜러, 힐러가 뭔지도 모르고, 이동평균선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과 입사 전부터 딜힐 사이클과 각종 계산 방식 및 그것들이 가진 문제점에 대해서, 볼린져 밴드가 뭔지 P/E가 뭔지, 또 각종 지표의 문제점과 한계에 대해서 이미 모두 다 꿰고 있는 사람의 차이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클 수 있다.

노력은 해야겠지만 애쓰지 마. 될 일은 되고 안될 일은 안된다.
— 시지프스 EP.06

당신의 채용에, 당신의 입사에 성장 열매가 가득 하기를…​
건투를 빈다.

@codemaru
돌아보니 좋은 날도 있었고, 나쁜 날도 있었다. 그런 나의 모든 소소한 일상과 배움을 기록한다. 여기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한 개인의 관점이고 의견이다. 내가 속한 조직과는 1도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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